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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

원수를 경마장에 데려가라

영상을 전공한 K는 구인광고를 살펴보다 '경마새벽조교촬영'을 보게 된다. K의 눈길을 끌게 한 건 '경마'라는 생소한 분야와 다른 직종에 비해 높았던 급여였다. '아마도 구린 부분이 있으니 급여가 높겠지. 라고 K는 생각했으나, 당장 급한 생계를 위해 이력서를 작성한다. 약속을 잡고 회사에 도착하니 보통의 중소기업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K의 눈에는 모든 것이 낯설게 보였다. K는 방송팀 PD에게 우리가 촬영할 것은 새벽에 뛰는 말과 예상가들의 방송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부사항이 있었는데, '느려도 좋으니 절대 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K는 그렇게 출근을 약속 받았다. '틀리면 안된다.' K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새벽 5시 30분. '과천경마장에 집합하여 카메라를 설치하니, 경주로에 말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몇십 마리가 동시에 주로에 나왔다.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한 마리도 놓치면 안됩니다!" PD가 말했고, 카메라는 바쁘게 움직였다. K는 약 세 시간동안 500마리 가량의 말을 촬영하고 경마장을 빠져나왔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PD는 K에게 "이 영상은 경마 팬들에게 유료로 제공되는 정보이기 때문에 실수는 안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무실에 돌아온 K는 편집을 시작했다. 결국 이 일은 500개의 독립된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급여가 높은 것은 구리기 때문이 아니라, 힘들기 때문이었구나.'라고 K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늘 새벽에 훈련한 말들의 정보가 마사회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오자, 팀원들은 그것을 토대로 말들을 분리하고, 자막을 넣어주었다. 편집이 마무리 될 즈음, 예상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방송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PD는 K에게 저들이 경마판에서 가장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고 소개했지만, K는 그저 '도박전문가'라고 받아들였다. 그들의 인상부터 예사롭지 않아 K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은 중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예상가들은 익숙하게 공부한 노트와 펜을 가지고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그리곤 금주에 열리게 될 경주 전부를, 상세히 풀어주었다. 모든 일과기 끝날 즈음 PD는 다시 한 번 K에게 당부했다. "틀리면 안됩니다. 이 정보 하나에 많은 돈이 오가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온 K는 녹초가 되었다. 내일은 주말이었지만, 경마가 열리는 날이라 더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그날을 경마 팬들은 마요일'이라고 부른다. K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내일은 실습차원에서 K도 경마장에 가야 한다. 베팅을 해봐야 이곳의 시스템을 빨리 이해할 수 있다고, PD가 말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회사에서 제공하는 예상가들의 유료 베팅정보문자를 K의 휴대폰 번호로 신청한다고 했다. 이왕가는 거 재밌게 즐겨보라면서 말이다. '혹시나 중독이 되면 어쩌나...'K는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러던 중 세 통의 문자가 K의 휴대폰에 도착했다.

「두마리 반드시 잡아내겠습니다!」- 마복식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화이팅!」 - 강호

「고배당 자신 있습니다!」- 고태일

문자를 받은 K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K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되뇌었다. '틀리지 말아야 한다.'


2017 함정식 전시 서문을 대신한 엽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