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식은 메시지 전달을 자신의 작업의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으며, 철학적 차원에서든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든 예술적․미학적 차원에서든 '주장해야 할'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관념이나 사상(思想)도 설정해놓고 있지 않다. 영상 작업에 주력하고 있는 이 젊은 작가는 이미지의 물질성 자체에 대한 탐구에 전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의 작업의 의도는 정식화될 수 있는 어떤 의미(내용)를 제시하는 데에 있지 않고, 어떤 상황의 다양한 측면과 층위를 표현하는 데에, 그에 따라 사람들 각자에게 그 상황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데에 있다. 그가 내용을 무시하는 형식주의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그가 미리 정립되어 있거나 사람들에게 주입시켜야 할 어떠한 관념도 내세우고 있지 않으며, 사람들이 하나의 상황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그 상황의 중심으로 들어가도록 돕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관념을 '전시(展示)'해놓고 그것을 공표하는 것, 그것은 함정식을 비롯한 작가 일반의 몫이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또는 원칙적으로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작품 뒤에 숨겨놓거나 심지어는 무화(無化)시키기를 원할 것이며, 그 반대급부로 작품이 현시시키는 어떤 정념이나 느낌을 어떠한 명제로도 쉽게 규정되지 않을 '비밀'로 '드러내기를' 원할 것이다. 문학에서든 미술에서든 영화에서든 무릇 좋은 작품은 사람들에게 어떤 강력한 아펙트(affect)를 전해주지만, 그러한 만큼 하나의 해석으로 손쉽게 한정되지 않고, 또한 그러한 만큼 지속적으로 의문거리로 남는다. 먼저 함정식의 작업 결과물들이 내게 물음표를 던져주었고 물음표로 계속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특히 기독교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그의 최근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작업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러면서 또한 나는 그 해석이 단순히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응답이나 웃음으로, 응답의 웃음으로, 웃음의 응답으로 될 수 있는 지점으로 향해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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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식은 내게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었지만, 어느 시점 이후로 그만두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의 그러한 말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주제로 설정되어 있는 「내게 강 같은 평화」, 「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단편 영화 「기도」를 주의 깊게 보았고, 그러면서 그에게는 기독교가 중요한 문제이자 지속적인 성찰의 대상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 이러한 의문들이 들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성(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후에 다시 생각해보야 할 것이다)은 거의 무관하지 않은가? 교회로부터, 또한 사실상 기독교로부터도, 보다 정확히 말해 '한국' 기독교('한국' 기독교, 왜냐하면 함정식의 궁극적 탐구 대상은 종교 자체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이곳에서의 사회적․실존적 현상․상황으로서의 기독교이기 때문이다)로부터도 이미 발을 뺀 것처럼 보이는 그가 왜 다시 그 문제로 되돌아갔는가? 한국 기독교 문제에 대한 그의 천착의 총결산인 그 단편 영화의 제목은 왜 '기도(祈禱)'인가? 그렇다면 그는 또 다른 종교성을 추구하고 있는가? 「기도」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자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함정식 자신이며—"나는 오랜만에 기도드렸다"—, 이는 이 작품 자체를 일종의 기도로 보게 만든다. 그에게는 이 작품을 만드는 것 자체가 기도이며, 그는 이 작품을 보는 어느 누구가 자신의 기도 소리를, 기도의 침묵을 듣기를 원한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 또한 기독교, 한국 기독교 바깥에서, 서울의 퇴락한 한 지역 동대문구 이문동(「기도」와 이 단편 영화에 삽입되었고 그 이전에 독립된 창작물로 발표되었던 「내게 강 같은 평화」의 배경이 된 장소)에서, 말하자면 잔인한 광기(신자유주의? 지배자들이지만 근본적으로 천민들이자 노예들일 수밖에 없는 자들의 극우 정치? '헬 조선'?)로 인해 갈가리 찢긴, 그래서 더 초라하고 더 남루하고 더 고독한 우리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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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오후에서 밤까지 하루 동안 이문동에서 벌어진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오래된, 대개 80년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단독 주택들이 채우고 있는 이문동 거리들의 여러 일상적 풍경이 연이어 나타난다. 그 풍경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의 시선에 포착된 장면들, 아무거나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찍어대는 습관을 가진 '사진 찍는 여자'가 셔터를 눌러 얻어낸 이미지들이다. 그녀는 애인인 것처럼 보이는 남자와 이문동 거리들을 거닐면서 사소하고 무의미한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셔터를 누르고는 "귀여워, 아기자기해"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진을 계속 찍으면서 애인과 함께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그녀는 우연히 지나치게 된 한 주택의 여기저기를 찍다가 그 집의 대문을 열고 나온 조야한 차림과 태도의 불량스러운 남자와 마주하게 된다. 그 남자는 담배를 피우면서 증오와 경멸과 원망과 자조․허무가 교차라는 묘한 눈빛으로 커플을 노려보고, 그 눈빛에 위협을 느낀 그녀의 애인은 그와 말없는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나 커플은 그 집을 그냥 떠나고, 둘만 남게 된 후 남자는 그녀에게 대단히 불쾌하다고 말하면서 화 난 심기를 내비치고 아무거나 아무나 찍어대는 그녀의 습관을 "굉장히 안 좋고 유치하기까지 하다"면서 그녀를 탓한다. 그러한 원망을 듣고 나서 그녀는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고 제안하고, 그는 짧은 말로 동의한 후 그녀를 거리에 남겨두고 가버린다. 그녀는 사방이 깜깜해지고 나서 혼자 그 집에 다시 찾아가 우리가 보기에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 남자와 다시 마주한다. 이어서 그의 사진을 꼭 찍고 싶다고 요청하는데, 그는 의아해 하면서 거절하고 꺼져버리라는 단언을 남긴 채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고나서 자신의 아내가 있는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의 아내는 거기에 커다란 빨간 네온사인 십자가 하나를 세워놓고 그 옆에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그러한 모습을 본 그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아내를 구타하는데, 그녀는 마찬가지로 욕설로 응수하면서 그를 저주한다. 흥분한 채로 텐트 밖으로 나온 그는 자신 앞에서 카메라(스마트폰)를 들고 있는 '사진 찍는 여자'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둘 사이에 다시 긴장이 흐르고, 그녀는 그를 찍을 준비를 하는데, 이에 극도로 자극된 그는 웃통을 벗어젖히고 "오늘 사람 하나 죽일 일 생겼다"면서 그녀를 향해 달려들려 한다. 그 위협 앞에서 그녀는 그를 향해 셔터를 누른다. 이러한 허구의 이야기 앞뒤로 함정식이 실제로 겪었던, 자막으로 처리된 이야기가 배치된다. 앞에서 우리는 그가 우연히 한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 할머니가 자신에게 초콜릿을 주면서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다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뒤에서, 즉 영화 마지막에 그 할머니가 그에게 전화번호를 요구했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선선히 응했으며 자신의 실제 번호를 건넸다는 문장들이 지나간다. 이어서 영화의 맨 마지막이 이러한 자막으로 끝난다. "내 걱정과 달리 전화는 한 통도 오지 않았다./나는 오랜만에 기도드렸다./아멘."
왜 함정식은 비록 자막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기도드림으로써 영화를 마무리하는가? 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기도드리는가? 이러한 물음은 그 자체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기 이전에 그가 과거에 교회를 다니면서—형식적으로든 아니든—믿었던 기독교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는 필자에게 보냈던 메일 한 통에서 이렇게 썼다. "얼마 전까지 저는 '한국의 기독교'와 관련된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저는 이 작업들에서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도 그 반대의 입장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교회)가 존재하는(힘을 발휘하는) 장소는 어디인지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인지, 무슨 음악을 듣고 거기서 어떤 감각을 공유하는지 보여주는 작업들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와 같이 겹이 두터운 소재를 다룰 때, 작가가 어떤 입장을 취하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제게 '기독교를 찬양하느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한국의 기독교는 역시 별 수 없죠'하며 의중을 물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제시했던 「기도」의 줄거리만을 두고 볼 때 함정식은 대체로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영화 안에 삽입되어 있고 그 이전에 그 자체로 독립된 하나의 영상 작업이었던 「내게 강 같은 평화」와 또 다른 영상 작업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보면 그의 입장은 해독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전작(前作)은 검은 색 망토의 죽음을 상징하는 악마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 악마는 어울리지 않게 손에 불빛을 들고 한밤중에 이문동의 초라한 골목골목을 춤추며 누비고 다닌다. 그 악마는 쇠락한 장소에 잠들어 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빛을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빛을 전해주는 악마, 악마가 전해주는 빛이라는 아이러니. 후작(後作)은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 맞추어 느리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는 산발 여인의 뒷모습을 비춘다. 산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신처럼 보이는 이 여인은 어둠 속에서 자신 앞에 펼쳐지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자연의 영상(영화 「고야니스카시」의 산․하늘․구름․ 등의 장엄한 이미지들, 그것들은 일종의 초월성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을 응시하면서 기도하고 신의 은총을 갈구한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향해 있는 지점은 초월적이거나 탈세속적인 어느 지점이, 천상의 종교인 기독교가 추구하는 신의 은총이나 영혼의 구원이 실현되는 곳이 아니다. 그 지점은 기독교 자체와 거의 무관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함정식은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탐색은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 전개된다. 「내게 강 같은 평화」는, 이 작품에 붙인 그 자신의 언급대로, "낙후된 동네 대한 기도"일 뿐이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상에서, 이 세상에서 절망한 한 인간의 사실상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향해 내뱉는 탄식일 뿐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들 앞에 쏟아내는 울음, 「기도」에서 옥상에 텐트치고 그 안에서 신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의 신음도 결국 이문동의 아무개가—궁핍 때문이든, 차별 때문이든, 과도한 노동 때문이든, 어쨌든 종교 자체와는 무관한 이유로—막다른 골목에서 토해내는 절규와 어떠한 점에서도 다르지 않다. 함정식은 다만, 그냥, 어떠한 종교적 문맥도 없이 이문동의 그 아무개를 위해, 신을 향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아무개를 향해서 또 다른 아무개의 '아무개'라는 이름과 자격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거기에 무신론적(無神論的)인, 보다 정확히 말해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단순히 무관한 그의 종교성이 있다. 함정식이 드리는 기도에는 단순한 심오함이 있다.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변절한' 이 청년은 그 나이 또래의 '배교자들'이 흔히 그렇게 하듯 한국 기독교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천민자본주의'의 한 현상이라고 단순히 제단하지 않고, 그들이 한국 기독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조건들(그것들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종교적이지 않고 정치적․사회적이다)을 성찰하는 동시에 그들의 고통의 영역(그것 역시 종교적․기독교적이지 않고 사회적 차원에서 보편적․일반적이다)을 공유하고 그들과 그들의 고통을 향해 단순하게 자신을 연다. 물론 한국 기독교가 이제 거대한 공룡이 되어버린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의 산물이자 그 자본주의를 지속시키고 나아가 공고히 하고 있다는 비판은 그 자체로서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원칙적으로 한국 기독교의 권력자들과 엘리트들을 향해 있어야만 하는 것이며, 그것이 만약 자본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이문동의 어느 기독교인에게로 향한다면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다. 그 기독교인을 향해 드리는 함정식의 기도는 어떤 관념의 반복—그것이 설사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이 아니라, 무명씨들의 공동의 삶의 구체적 상황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행위'라는 점에서 심오하다.
둘째 그의 작업들의 형식적 측면을 되돌려 볼 때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그의 기도의 심오함이다. 그의 작업들은, 특히 기독교와 관련된 것들은 조야한, 나아가 '싸구려'의 이미지들과 경박하거나 청승맞은 음악(「내게 강 같은 평화」에 삽입된 펑크 디스코풍의 같은 제목의 찬송가, 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서 들을 수 있는 처량하게 편곡된 같은 제목의 찬송가)으로 채워져 있어서, 사실상 기도와 같은 어쨌든 '진지한' 행위를 위한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와 같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왜 이 작품의 제목이 '기도'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함정식은 거룩한 의식(儀式) 가운데, 성스럽고 장엄한 종교음악을 배경으로, 엄숙하고 심각한 표정과 함께 기도하지 않는다. 그의 기도는 저잣거리에서 드물게 일어날 수 있는 무상(無償)의 행위 하나에 가깝다. 가령 한번 짓는 미소, 우정의 웃음, 한 번의 악수 건넴, 또는 미약하게 번져나가는 눈물, 그것은 검은 구름을 순간 뚫고 나오는, 그러나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한 줄기 햇빛과 같아서 그의 작품에 비밀이나 의문거리로 매설(埋設)되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기도」의 경우 이러한 것이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달려들려는 그 남자의 폭력의 위협 앞에서 셔터를 누르는 '사진 찍는 여자'의 행위. 그것은 시각의 일반적 작용의, 즉 거리를 두고 규정하며 구분하고 분석하고 판결하는 시각의 지적(知的) 작용(본다는 것과 인식하고 구별하는 지적 작용의 동일성, 데카르트의 말대로—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기억에 따라 인용해본다면—"명석하고 판명하게 본다는 것은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의 반대편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것이나 어느 누구를 향해 자신을 열고 다가가는 움직임, 일종의 어루만짐("눈이 더듬는 행위는 촉각적인 쓰다듬음의 특출한 한 변양이다"라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을 되돌려보자), 일종의 악수 건넴, 끌어안기, '사진 찍는 여자'는 이문동의 여러 사물․풍경을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어루만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거친 남자를 쓰다듬고자 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작가 함정식이 「기도」라는 작품 바깥에서 실제로 했던 행위 하나, 이미 교회를 떠난 자신에게 다시 교회에 다니라고 종용할 뻔한 의도로 자신의 전화번호를 요구했던 할머니에게 그것을 단순히 건네주었던 행위, 그것은 매우 하찮은, 아무것도 아닌 행위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거대화된 '천민자본주의'의 저잣거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열림의 몸짓이다. 즉 어쨌든 일종의 기도, 또 다른 기도, 한 무명씨로 향해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기도,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찮고 무의미하며 단순하기에 한국 기독교의 거대한 조직 그리고 마찬가지로 거대하고 완강한 이데올로기 한복판에 뚫린 구멍을 가리킨다. 진정한 종교성은 '내'가 '나'의 에고를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자본의 욕망과 어떠한 점에서도 다르지 않은 신과 구원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단순히, 단순히 '너'와 '나' 사이에 있을 것이다.